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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진의 바이오 뷰] 시드 앤드 소일(Seed and S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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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 조회327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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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비옥한 토지를 만나야 꽃과 열매를 맺는다. 과학계에서 씨앗이 과학자라면, 토지는 연구환경일 터. 우리의 씨앗과 토지는 이대로 괜찮은가.

필자의 지도교수인 고(故) 이사야 피들러 교수의 집무실에는 여러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영국 외과의사인 스테판 파젯의 사진도 그중 하나다. 그는 명망 있는 의학잡지 가운데 하나인 <란셋> 창간호(1889년)를 통해 암세포의 전이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것을 과학계에 알렸다. ‘시드 앤드 소일(Seed and Soil)’ 이론이다. 

항암제 개발의 성공 확률 획기적으로 높인 피들러 교수

이 이론에 따르면 암세포가 특정 장기의 미세환경에 ‘적응’하고 장기는 병변을 만들고 자랄 수 있도록 암세포를 ‘선택’해줘야 전이가 이뤄진다. 따라서 암의 종류에 따라 전이되는 패턴이 있고 이를 예측할 수 있다. 혈관이나 림프관을 떠다니는 암세포가 아무 장기나 침범해 자라나서 전이 병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 이론은 1928년 미국의 병리학자 제임스 유잉이 ‘전이는 단순히 혈액순환에따른 무작위적이고 우연한 결과’라고 했던 이론에 밀려서 잊혔다. 당시 유잉은 의과대학, 연구비재단, 미국암학회 등의 설립을 주도해 과학계에서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피들러 교수가 유잉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1984년에야 다시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묻혀 있던 이 이론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 ‘전이가 순차적이고 선택적인 과정’이라는 이론을 완성한 피들러 교수의 업적은 오늘날 항암제 개발의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동소이식 모델, 표적항암치료제의 개념 및 병용용법 개발의 근간이 됐다. 종양학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다. 

공정과 정직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이겨낸다

이 흥미로운 과학계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목소리가 크고 힘을 가진 사람의 주장뿐 아니라 전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용하지만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공평하게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계에서 도전과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잘못된 이론을 밝히고 바로 잡아 새로운 가설을 만들고 증명해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것이야 말로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다.

피들러 교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과학적인 이유가 아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로 과학계의 주류가 결정되는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다수의 횡포인 ‘다수결의 법칙’이 통하지 않을 수 있는 분야가 과학이다. 과학적 이슈는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풀어야 한다.

둘째, 정직과 재현의 이슈다. 어떤 과학적 이론이나 가설이 소위 대세가 되면 수많은 과학자 그룹이 그 주제에 관련된 연구를 하고 가설을 증명하고 이론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결과를 도출해낸다. 여기에는 과학적 흥미뿐 아니라 유행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다른 주제를 다루면 과제로 선정되거나 연구비를 받기가 어렵고, 무엇보다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강박감이 기저에 깔려 있기도 하다.

“요즘엔 이 주제가 아니면 연구비를 신청해도 심사위원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은 극히 후진적인 일이다.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또 새로운 가설과 이론을 적용해 과거에 보고된 결과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즉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의 수많은 실험이나 분석 결과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저널에 실린 논문들이나 학회에서 발표된 초록들은 어느 전문가들에 의해 얼마나 검토되고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을까. 결과에 대한 충분한 신뢰성 혹은 재현성의 검증 없이 과학계가 ‘집단적 오류’에 빠져 있었거나 한때 대한민국과 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인위적 실수’를 너무 많이 범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요즘 젊은 세대의 과학자들은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한 시절을 풍미했다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가설과 이론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계에서의 시드 앤드 소일의 의미

셋째, 시드 앤드 소일의 의미다. 직역해서 풀어보면 심을 씨앗과 맞는 토양에 심어야 제대로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피들러 교수는 같은 토마토 씨앗을 자신의 조국인 이스라엘의 사막과 미국 텍사스의 메 마른 땅, 그리고 플로리다의 비옥한 토지에 심었다. 그 결과 토마토가 열리는 개수, 크기, 맛 등이 어떻게 다른지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곤 했다.

암세포가 림프관이나 혈관을 통해서 온몸을 순환하지만 전이 병변을 만드는 곳은 암세포가 정착해서 살아남고 세포분열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관이다. 암이 진단되면 암세포의 종류에 따라 전이가 일어났는지, 어느 장기를 자세히 검사해야 할지, 암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있다. 또 암세포가 각 장기의 미세환경과 주고받는 여러 가지 신호와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물질이나 기전들이 항암제 개발의 표적이 된다. 종양학에서 시드 앤드 소일 이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연구환경을 만들자

과학계에 이 이론을 적용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과학자(seed)들도 자기들에게 맞는 과학계, 즉 연구환경(soil)을 만나야 꽃(연구)을 피우고 열매(결과)를 맺을 수 있다. 훌륭한 과학자와 비옥한 연구환경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되는 셈이다.

과학계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건설적인 경쟁, 공정한 평가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선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양성해내야 한다. 국가와 사회는 과학자들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연구 활동의 동기를 부여하고 지원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 비옥한 연구환경을 만들어 국내외의 유능한 과학자들이 합류하도록 해야 한다.

씨앗이 불량하면 아무리 옥토에 뿌려져도 열매는 커녕 꽃도 피우기가 힘들고 물과 영양분이 부족한 척박한 땅에서는 우량한 씨앗을 뿌리고 가꿔도 싹을 틔우기 어렵다. 모든 사람의 선망이 되는 큰 무대에는 주역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은 최고의 엔터테이너들이 줄을 서게 마련이다. 멍석을 깔아줘야 광대들이 춤을 출 수 있다. 두껍고 큰 멍석을 깔아야 큰 춤꾼들이 춤을 추려고 온다. 큰 멍석을 짤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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